연인이 다툰 뒤 화해 차원에서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더라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불신해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지난해 12월 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20년 4월 자택에서 전 여자친구 B씨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헤어지자"며 주거지를 빠져나가려는 B씨를 침대에 넘어뜨리고 양팔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성관계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 측은 법정에서 "성관계는 강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묵시적 합의에 따라 이뤄졌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특히 B씨가 강간 피해 이후 A씨와 함께 다녀왔던 템플스테이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실 등을 근거로 "B씨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A씨는 "평소 싸우고 화해할 때 성관계를 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B씨가 성관계 당시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취지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도 명령했다. B씨가 강간 피해 이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했느냐"며 강제적인 성관계를 추궁하자, 변명하는 내용이 담긴 A씨의 녹음파일과 B씨의 법정 증언을 고려하면 진술 신빙성을 인정할 만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A씨 측이 주장한 템플스테이 사진 게재에 대해서도 "(사진에) A씨가 등장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하면 진술 신빙성을 깰 만한 자료로 보기는 어렵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A씨에게 죄를 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강간죄 구성요건 중 '피해자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가 증명이 안 됐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B씨의 진술은 '성관계가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다'는 사실 외에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는 A씨의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결여돼 있다"며 "유죄판결의 신빙성을 담보할 만한 구체성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A씨가 성관계를 다툼과 화해의 일환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A씨의 강간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다툼과 화해의 일환으로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B씨가 이번 성관계까지 용인했거나 폭행·협박이 없었으리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진술 전체의 신빙성을 평가해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그러면서 "A씨가 신체조건 차이를 이용해 몸 위에서 누르는 방법으로 제압했다"는 B씨 진술을 토대로 "A씨가 B씨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폭행·협박을 저지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출처: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