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2021. 10. 28. 선고 2019다293036 판결 -
1. 사실관계와 소송 경과
원고는 피고와 토지매매계약을 체결한 후 피고에게 매매대금을 모두 지급하였고, 피고 역시 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를 지정한 법무사에게 교부하였다. 그런데 원고가 피고에게 농지전용허가와 농지보전부담금을 처리해달라면서 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의 수령을 거절하자 피고는 원고에게 매매계약을 해지한다는 통보를 하면서 수령한 매매대금을 공탁하였다. 그러나 원고는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후에 피고를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절차의 이행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원심은 원고가 피고의 이행 제공에도 불구하고 피고에게 농지전용부담금을 부담하라고 요구한 것은 수령 거절에 따른 채권자지체에 해당하기 때문에 피고가 이를 이유로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대상판결은 채권자지체에 관한 민법 제400조, 제401조, 제402조, 제403조와 수령지체 중 이행불능이 된 경우에 관한 제538조 제1항의 규정 내용과 체계에 비추어 볼 때, 채권자지체가 성립하는 경우 그 효과로서 원칙적으로 채권자에게 민법 규정에 따른 일정한 책임이 인정되는 것 외에, 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하여 일반적인 채무불이행책임과 마찬가지로 손해배상이나 계약 해제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하면서 원심을 파기하였다.
2. 평석
채권자지체 제도
채권자지체란 급부의 실현에 채권자의 협력이 필요한 경우,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아 이행의 제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채권자가 그 급부의 실현에 필요한 협력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급부가 실현되지 아니한 상태를 말한다. 이렇듯 채권자의 협력이 필요한 채무에서 채무자가 자기의 할 일을 전부 하였음에도 채권자가 필요한 협력을 하지 않아 급부가 실현되지 않는 경우에도 채무자가 계속 이행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부담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우리 민법은 ‘채권자가 이행을 받을 수 없거나 받지 아니한 때에는 이행의 제공있는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고 하여 채권자지체를 인정하고(민법 제400조), 그 효과로 채무자의 책임을 경감하거나 비용을 채권자에게 전가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민법 제401조~403조).
이렇듯 우리 법은 채권자지체의 효과로 손해배상이나 계약해제를 규정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판결에서 채권자지체의 효과로서 손해배상이나 계약해제를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이유는 채권자지체의 법적 성질에 관하여 크게 두 가지 견해의 대립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채권자지체를 채무불이행의 일종이라고 견해(채무불이행설)이고, 다른 하나는 채권자지체 책임은 공평의 관점에서 법이 인정한 책임이라는 견해(법정책임설)이다.
우선, 채무불이행설은 채권자와 채무자는 급부의 실현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향하여 서로 협력하는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채권자는 채무자의 급부의무에 대응하여 협력의무를 부담한다고 한다. 따라서 채무자의 급부의무 불이행과 마찬가지로 채권자의 협력의무 불이행도 채무불이행이 되며, 채무불이행과 마찬가지로 채권자지체가 성립하려면 채권자의 귀책사유가 필요하다고 한다. 나아가 채권자지체의 효과로 민법에서 정한 내용 외에 손해배상청구권과 계약해제권을 인정한다. 한편, 법정책임설은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하여 권리만 가질 뿐 채무자에 대하여 어떤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설령 협력의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채무자의 급부의무와 성질이 다른 간접의무 내지 책무에 불과하다고 한다. 따라서 민법상 채권자지체는 채무자에게 발생하는 불이익을 공평의 관점에서 조정하기 위하여 일정한 효과를 부여하는 제도라고 한다. 이 견해는 채권자지체의 성립에 채권자의 귀책사유는 필요하지 않다고 하며 채권자지체의 효과로 손해배상청구권이나 계약해제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외에 절충설로는 법정책임설의 입장에서 매매, 도급, 임치와 같은 일부 계약에서는 채권자의 수령의무 내지 협력의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와 채권자지체에 대하여 채권자의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손해배상청구권과 계약해제권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판례의 태도
대상판결 이전에는 채권자지체의 효과로 민법 제401조를 적용하여 채권자지체 중 채무자에게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이 없다고 한 판결(83다카1476 판결)이 있었지만 손해배상청구권이나 계약해제권의 인정여부를 판단한 경우는 없었다.
그러다 대상판결이 처음으로 “채권자지체가 성립하는 경우 그 효과로서 원칙적으로 채권자에게 민법 규정에 따른 일정한 책임이 인정되는 것 외에, 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하여 일반적인 채무불이행책임과 마찬가지로 손해배상이나 계약 해제를 주장할 수는 없다”라고 하여 채권지체의 효과로서 손해배상청구권이나 계약해제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판시하였다.
다만, 대상판결은 “계약 당사자가 명시적·묵시적으로 채권자에게 급부를 수령할 의무 또는 채무자의 급부 이행에 협력할 의무가 있다고 약정한 경우, 또는 구체적 사안에서 신의칙상 채권자에게 위와 같은 수령의무나 협력의무가 있다고 볼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러한 의무 위반에 대한 책임이 발생할 수 있다. (중략) 이와 같이 채권자에게 계약상 의무로서 수령의무나 협력의무가 인정되는 경우, 그 수령의무나 협력의무가 이행되지 않으면 계약 목적을 달성할 수 없거나 채무자에게 계약의 유지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는 때에는 채무자는 수령의무나 협력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하여 채권자의 협력의무를 계약상 의무로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고, 그 협력의무가 계약 목적 달성에 필수불가결한 경우 등에는 채무자가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검토
채권자지체의 효과로서 민법 규정에 따른 일정한 책임 외에 손해배상이나 계약해제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 대상판결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채권자지체는 채무자의 변제의 제공이 있어야 성립하기 때문에 채무자는 채권자지체 중에 이행지체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민법 제461조). 따라서 지연손해금이나 위약금 지급의무는 발생하지 않는다. 한편, 급부가 실현되지 않아 채무자에게 발생하는 손해는 이자나 목적물보관비용 내지 변제비용의 증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민법은 채권자지체 중에는 이자있는 채권의 이자를 면제하고(민법 제402조), 목적물의 보관 또는 변제 비용의 증가분을 채권자가 부담(민법 제403조)하도록 하고 있다. 그렇다면 채권자지체의 효과로 법에서 정한 것 외에 따로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채권자지체의 효과로서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민법이 채무자의 책임을 경감하거나 채권자에게 전가하는 규정을 두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편, 우리 판례는 원칙적으로 주된 채무가 아닌 부수적 채무의 불이행을 이유로 하여서는 계약을 해제할 수 없고, 그 부수적 채무의 불이행으로 인하여 계약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 또는 특별한 약정이 있는 경우에만 부수적 채무의 불이행을 이유로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한다(2011다102301 판결). 즉, 채무자의 급부의무와 같은 주된 의무의 불이행만이 계약해제권을 발생시킨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채권자의 협력의무를 인정할 법적 근거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가사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를 채무자의 급부의무와 같이 채권관계에 중요한 주된 의무라고 할 수는 없다. 채권자의 협력의무에 대응하는 어떤 구체적인 권리가 채무자에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권자의 협력의무를 일률적으로 인정하고 그 불이행을 채무불이행으로 취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계약해제권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채무자는 변제공탁이나 등기인수 청구 등으로 자신의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쌍무계약에서 채권자지체가 성립하면 보통 이행거절도 함께 성립하기 때문에(가령, 93다11821 판결) 채권자지체의 효과로 계약해제권을 인정해야 할 필요도 크지 않다.
다만, 대상판결은 채권자의 협력의무를 계약상 의무로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고 그것이 계약에서 갖는 의무나 비중에 비추어 일정한 경우 협력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계약해제권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협력의무가 계약상 의무가 되었다면 그 불이행은 본래적 의미의 채권자지체가 아니라 채무불이행이라고 볼 여지도 있는데 대상판결이 이에 대한 검토없이 채권자지체의 효과로 계약해제권도 인정될 수 있는 것처럼 판시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나아가 협력의무의 불이행으로 인한 책임발생에 채무불이행과 같이 채권자의 귀책사유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하지 않은 점도 아쉬움이 남는다.
출처 : 법조신문(http://news.koreanbar.or.kr)